미국 보훈제도 깊이 읽기 (3) — 법이 정한 ‘의심의 방향’: 공무 중 원칙과 입증책임

한 나라 보훈제도의 성격은, 겉으로 드러난 급여액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적 질문에 담겨 있다. ‘사실이 불분명해 의심이 남을 때, 법은 그 저울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는가.’ 다친 사람 쪽인가, 국가 쪽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그 나라가 부상 군인을 대하는 태도다.
미국 보훈제도 시리즈 3편은, 앞선 편들에서 예고한 입증책임 문제를 법 조문의 층위에서 정밀하게 해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법은 의심을 일관되게 군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이도록 여러 겹의 ‘추정(presumption)’을 쌓아 두었고, 한국법은 다친 당사자가 스스로 증명하고 한 번 더 걸러지는 구조를 두고 있다. 같은 부상을 두고 두 법제가 어떻게 갈라지는지, 조문과 판례로 따라가 본다.
출발점 — 보상의 문을 여는 세 가지 요건
먼저 공통의 틀부터. 미국에서 ‘공무상 부상(service connection)’으로 보상을 받으려면 원칙적으로 세 가지를 보여야 한다. ① 현재의 장애가 있고, ② 그 부상·질병이 복무 중 발생·악화되었으며, ③ 그 둘 사이에 인과관계(nexus)가 있다는 것이다.[1] 여기까지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는 그다음, ‘이 요건들을 누가, 얼마나 증명해야 하는가’에서 벌어진다.
미국 — ‘추정의 탑’, 다섯 겹으로 의심을 군인에게
미국법은 위 요건들을 개인에게만 떠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개의 법적 추정을 쌓아, 불확실한 지점마다 저울을 군인 쪽으로 미리 기울여 둔다.
- ① 건강 추정(§1111, Presumption of Soundness). 입대 신체검사에서 특별히 기록되지 않은 한, 군인은 입대 당시 건강했다고 추정된다. 국가가 이를 뒤집으려면 ‘그 병이 입대 전부터 있었고 복무로 악화되지도 않았다’는 점을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clear and unmistakable evidence)로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넘기 어려운 높은 벽이다.[2]
- ② 공무 중 추정(§105, Line of Duty). 현역 복무 중 입은 부상·질병은 원칙적으로 ‘공무 중’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의 중대한 고의·비행이나 약물·알코올 남용이 원인이라는 점을 국가가 반대로 증명하지 못하는 한 인정된다.[3]
- ③ 특정 질환 추정(Presumptive Service Connection). 고엽제 노출(§1116)이나 걸프전·유해물질 관련 질환처럼, 일정 요건만 확인되면 인과관계 증명 자체를 면제하고 복무 관련으로 추정한다. 2편에서 본 1991년 고엽제법과 2022년 PACT Act가 이 목록을 넓혀 왔다.[4]
- ④ ‘의심스러울 땐 군인에게(§5107(b), 38 CFR 3.102)’. 인정 근거와 반대 근거가 엇비슷하게 팽팽할 때(equipoise), 그 의심은 반드시 신청인에게 유리하게 해소되어야 한다. 요구되는 증명 수준도 ‘확실히’가 아니라 ‘적어도 아닐 가능성만큼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at least as likely as not, 50%)’면 충분하다.[5]
- ⑤ 국가의 조력 의무(§5103A, Duty to Assist). VA는 신청인이 혼자 증거를 찾아 헤매게 두지 않고, 관련 군·의무 기록과 검사를 국가가 함께 확보할 의무를 진다.[6]
이 다섯 겹을 겹쳐 놓으면 하나의 방향이 또렷해진다. 불확실한 모든 지점에서, 법은 군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저울을 기울인다. 국가는 ‘아니다’를 증명해야 하는 쪽에 선다.
한국 — ‘이중 관문’, 증명과 분리를 개인이 감당
한국의 구조는 출발선이 반대다. 두 개의 관문이 당사자 앞에 놓인다.
첫 번째 관문 — 본인이 인과관계를 증명한다. 우리 제도에서는 원칙적으로 신청인이 직무수행과 부상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대법원도 “직무수행 등과 부상(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측, 즉 신청인이 부담한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3. 9. 23. 선고 2003두5617 판결).[7] 미국이 ‘공무 중’을 추정하는 자리에, 한국은 당사자의 증명을 요구한다. 시간이 흘러 기록이 사라지거나 부대가 개편되면, 그 불이익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된다.
두 번째 관문 — 인정돼도 다시 둘로 나뉜다. 어렵게 공무 관련성이 인정되어도 끝이 아니다. 2011년 제정된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률」은, 부상이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 관련’이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그 직접 관련성이 약하면 보훈보상대상자로 나눈다.[8] 같은 군 복무 중 부상이라도 ‘얼마나 국가 수호와 직접 관련되는가’라는 2차 심사를 한 번 더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구분 자체가 위헌은 아니라고 보았지만(헌재 2020. 11. 26. 선고 2018헌바92 결정),[9] 앞선 국회 세미나에서 짚었듯 그 ‘직접 관련성’ 기준이 군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는지는 여전한 쟁점이다.
두 법제를 마주 세우면

정리하면 이렇다. 미국은 입증의 부담을 국가로 옮기고, 남은 의심마저 군인에게 유리하게 해소한다. 한국은 그 부담을 상대적으로 개인이 더 지고, 인정 이후에도 ‘직접 관련성’이라는 문턱을 하나 더 둔다. 이는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법이 ‘의심의 방향’을 어디에 두었는가의 차이이며, 동시에 한국 보훈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여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잣대 — 산재는 ‘질병’을 어떻게 인정하나
사실 이 ‘입증의 방향’ 문제에 대한 참고 답안은 이미 우리 제도 안에도 있다. 바로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이다.
산재 역시 원칙적으로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근로자 측이 입증한다. 그러나 그 부담은 여러 장치로 크게 완화되어 있다. 첫째, 산재보험법과 시행령(별표3)은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해, 일정한 노출·근무 요건을 충족하면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둘째, ‘추정의 원칙’을 두어 요건이 맞으면 업무상 질병으로 추정한다. 셋째, 대법원은 그 입증의 정도에 대해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사정을 볼 때 상당인과관계가 ‘추단(推斷)’되면 입증된 것으로 본다”고 거듭 판시해 왔다.[10] 직접 증거가 없어도 간접 사실과 경험칙으로 개연성이 인정되면 업무상 재해로 본다는 것이다.[11]
그 결과 산재에서는 원인을 콕 집어 증명하기 어려운 질병 — 직업성 암, 뇌·심혈관 질환 등 — 도 상당 부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 그런데 같은 나라 안에서, 국가의 명령에 따라 복무하다 병을 얻은 군인은 오히려 더 엄격한 ‘본인 입증’을 요구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회 세미나에서 제기된 ‘산재보다 못한 군인 보상’이라는 문제의식이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미국의 ‘추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산재제도가 이미 걸어간 완화의 길은 보훈 개선의 가까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같은 경과, 다른 책임 — ‘사망은 순직 추정, 부상은 본인 입증’
가장 결정적인 사례는 우리 군 제도 안에 이미 있다. 2021년 개정되어 2022년 7월 5일 시행된 군인사법은,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을 원칙적으로 순직으로 분류하도록 했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 등 예외에 해당한다는 점은 국가(군)가 증명해야 하며, ‘순직임’을 유족이 스스로 입증하던 부담이 국가로 넘어갔다.[12] 미국이 오래전 세운 ‘추정’의 원리를, 한국도 ‘사망’에 대해서는 이미 받아들인 셈이다.

여기서 형평성의 물음이 선명해진다. 부상과 사망은 사고의 경과가 같고, 그 결과가 부상에서 멈추느냐 사망까지 이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같은 훈련, 같은 사고, 같은 인과의 사슬을 지나왔는데 — 결과가 사망이면 국가가 ‘순직이 아님’을 증명하고, 결과가 부상이면 다친 당사자가 ‘공무 때문’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더 무거운 결과에는 국가가 입증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결과에는 개인이 입증하는 역전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 불일치는 단순한 설계의 틈이 아니라 법의 형평성에 관한 물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해법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국가가 ‘사망’에 대해 이미 받아들인 ‘추정과 국가 입증’의 원리를, 같은 경과를 지나온 ‘부상’에까지 넓히는 것 —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합적인 다음 단계다.
비판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하여
이 비교의 목적은 우열을 가리는 데 있지 않다. 한국의 보훈도 짧은 기간에 눈에 띄게 전진해 왔다. ‘돕는다(원호)’에서 ‘예우’로, 다시 2023년 국가보훈부 승격과 국방부·국가보훈부가 손잡은 국가책임형 통합지원서비스로 — 이미 방향은 ‘국가가 먼저 책임지는’ 쪽을 분명히 향하고 있다. 남은 과제는 그 방향을 법으로 확실히 못 박는 일이다.
미국의 경험이 일러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의심의 방향’을 개인에서 국가로 옮기는 일은 선의나 행정 재량만으로 되지 않는다. §105의 공무 중 추정도, 1991년 고엽제법의 질환 추정도, 2022년 PACT Act의 대규모 확대도 모두 의회가 만든 법률로 제도가 되었다. 결국 부상 군인의 입증 부담을 덜고 심사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길은, 관련 법의 정비와 — 필요하다면 부상 군인을 위한 새로운 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비로소 단단해진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입법부의 관심이다. 앞선 국회 정책 세미나가 보여주었듯, 문제를 아는 것과 그것을 법으로 바꾸는 것 사이에는 국회의 의지라는 다리가 놓여야 한다. 사단법인 퍼플하트는 ‘다친 사람이 홀로 증명하는 제도’에서 ‘국가가 먼저 손 내미는 제도’로 나아가도록, 입법 논의 곁에서 근거와 목소리를 보태겠다. 다음 편에서는 이 원칙을 실제로 움직이는 미국 제대군인부(VA)의 조직 — 중앙과 전국 지방망을 들여다본다.
출처 및 각주
- 공무상 부상(service connection)의 기본 요건과 3요소(현재 장애·복무 중 발생·인과관계): 38 U.S.C. §1110·§1131; Cornell Law School LII 및 관련 해설(38 U.S.C. §1110).
- 건강 추정(Presumption of Soundness)과 ‘명백·확실한 증거’ 반증 기준: 38 U.S.C. §1111 (Cornell LII).
- 공무 중(line of duty) 추정: 38 U.S.C. §105.
- 특정 질환 추정(presumptive service connection)과 확대(고엽제·PACT Act): 38 U.S.C. §1116 등; 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The PACT Act and your VA benefits.
- ‘의심스러울 땐 군인에게’(benefit of the doubt)와 ‘at least as likely as not’ 기준: 38 U.S.C. §5107(b); 38 C.F.R. §3.102 (Reasonable doubt).
- 국가의 조력 의무(duty to assist): 38 U.S.C. §5103A.
- 한국 — 신청인의 입증책임(상당인과관계): 대법원 2003. 9. 23. 선고 2003두5617 판결.
- 한국 — 국가유공자와 보훈보상대상자의 구분(‘직접 관련성’):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률」(법률 제11042호, 2011.9.15 제정), 국가법령정보센터.
- 한국 — 구분의 합헌성: 헌법재판소 2020. 11. 26. 선고 2018헌바92 결정.
- 한국 산재 —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산재보험법 제37조·시행령 별표3)과 ‘추정의 원칙’: 고용노동부 「찾기 쉬운 생활법령정보」,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
- 한국 산재 — 입증 정도의 완화(‘상당인과관계 추단’·개연성 이론)와 합헌성: 대법원 판례(대법원 2021. 9. 9. 선고 2017두45933 전원합의체 등) 및 헌법재판소 2015. 6. 25. 선고 2014헌바269 결정.
- 군인사법 개정(2021년 개정, 2022. 7. 5. 시행) — 의무복무 중 사망 시 원칙적 순직 분류, 고의·중과실 등 예외는 국가가 증명: 「군인사법」 제54조의2 등 국가법령정보센터; 한국경제, ‘군 복무 중 사망하면 순직…고의·중과실 여부는 국가가 증명’(2021).
본 글의 미국 법령 인용은 38 U.S.C.·38 C.F.R. 조문과 공개 해설을, 한국 법·판례 인용은 국가법령정보센터 및 대법원·헌법재판소 결정을 근거로 정리했다. 개별 사건의 결론은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